[OBS플러스=정솔희 기자] 그를 만나기 전, 묵직한 카리스마에 눌려 입 한 번 제대로 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이런 걱정들은 쓸데없는 걱정이 었다는듯 온화하고 따뜻한 미소로 맞아준 박근형. 그는 영화 '장수상회'를 통해 노년에 주연을 맡은 배우로서의 책임감과 설렘에 들떠 있었다. 마치 신인배우처럼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영화에 돌아온 그는 누구보다 뜨겁고 또 뜨거웠다.

# "'장수상회', 다른 배우에게 뺏길까 걱정"

박근형은 연기경력 햇수를 센다는게 의미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고 친숙한 배우다. 드라마, 영화만 해도 200여편 가까이 왕성하게 활동해온 그가 '장수상회'를 통해 오랜만에 스크린에 주연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동안 보여줬던 무거운 카리스마를 벗고 달달한 노년의 로맨스라니. 청년 시절의 멜로영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순간이다.

"10대나 70대가 갖고 있는 설렘 자체는 같다고 본다. 과거에 해왔던 작품들 중 사랑 이야가 많아서 분명 노하우가 생겼을 거라고 생각한다(웃음). 사실 이런 기회가 오리라고 전혀 생각 못했다. 드라마나 영화에 간단하게 나오다 이제 끝이겠구나 생각했는데 사랑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엄청난 일이다. 시나리오 받아보고 놀라기도 했고 다른 사람한테 뺏기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로 결정해줘서 감사하다"

박근형은 연기 욕심으로는 대한민국 배우들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열정적인 배우다. 수십년동안 연기를 해왔지만 여전히 그의 가슴 속에는 연기자로서의 열정이 살아숨쉬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노년의 나이에 찾아온 멜로 주연에 더욱 설레고 있었다.

"연기 욕심이 보통 이상이 넘는 사람이라 이걸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상당히 고민이 많았다. 감독님과 미팅할때 머리를 삭발하겠다고 했다. 감독님도 그얘길 하고 싶었는데 못하고 있었다더라(웃음). 더 자르고 싶었는데 영화상으로는 그정도가 제일 보기 좋다더라. 동네에서 보통 눈에 보이는 노인네로 보이는데 최적이었다. 어찌됐든 나이 70에 사랑 이야기를 하는건 나만의 행운이다. 배우로서 이게 시작이 됐으면 한다"

사실 박근형은 여전히 젊은 시절 못지 않게 멋진 분위기를 풍기는 배우다. 그래서 드라마에서는 여전히 황혼 로맨스의 주역인 배우다. 그가 다른 작품에서 보여줬던 로맨스와 '장수상회'에서 보여주는 로맨스는 어떻게 달랐을까.

"연속극은 메시지를 길게 늘려 보여줘서 장기적으로 감정을 나눠서 보여줘야한다. 영화는 두시간여만에 결정되는 이야기라 이쪽 표현이 나한테는 훨씬 좋다. '장수상회'는 쟁취하려는 사랑이다. 다른 점은 몰래 숨어서 보기도 한다는 거다(웃음)"

드라마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이미 감당해봤던 박근형에게 여유로운 영화 촬영장은 어땠을까. 오랜만에 돌아온 영화 촬영 현장에 낯설고 힘든 점이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그런 현장 분위기를 만들어 준 강제규 감독에게 감사를 표했다.

"강제규 감독이 대가라는 걸 그때 알았다. 배우가 연기할 수 있게끔 최대한 놀이마당을 제공해준다. 감독에 대한 믿음 때문에 기량껏 있는걸 다 보여줄 수 있었다. 성칠(박근형 분)이란 인물이 힘있게 나와서 극을 끌고 나가는걸 보니 감독의 편집술이라는게 거의 마술에 가까운 것 같다(웃음)"

그는 이번 작품에서 최적의 파트너 윤여정을 만났다. 윤여정 역시 박근형에 대한 믿음과 그동안 함께 알아왔던 세월이 가져다준 환상적인 호흡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윤여정은 어렸을때부터 성품을 잘 알고 있던 배우다. 두뇌가 아주 명석하다. 윤여정과 연기를 하면 주로 핀잔을 맞는 쪽이다. 한마디 하면 열마디가 되돌아오니까 말하기 싫다(웃음). 그걸 알고 부터는 슬슬 뒤로 피해다니고 그랬다. 연기할때야 의기투합해도 눈빛만 봐도 뭘할지 아니까 어떻게 받아칠지 알수 있어서 아주 편했다. 좋은 사람과 만나서 열심히, 재밌게 했다"

# "'장수상회', 연극학도 시절로 돌아가 연기"

박근형은 '장수상회'를 촬영하며 연극학도 시절로 돌아가 마음가짐을 달리했다. 55년도부터 본격적인 연극학도에 입문했던 그가 다시 초심을 가지고 자신의 연기를 돌아본 것이다. 본인 스스로를 '교과서적'이라고 표한 그에게 연극학도로서의 초심은 어떤 것일까.

"당시 연극만 60~70편을 했었다. 그때 열정이 얼마나 넘쳤는지 40일 동안 연습해서 5일 공연하면 긑이었는데 그걸 1년에 11편씩 했다. 2년 정도를 연극에 미쳐있었다"

"연극학도로 돌아간 것처럼 분석하고 역할을 창조해낸 작품이 두 개인데 드라마 '추적자'와 영화 '장수상회'다. '장수상회'는 하나의 희곡같더라. 교과적이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편편히 잘라붙이고 오려서 성칠이란 인물을 하게 됐다. 그게 어떤 평가를 받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최상의 것을 했다. 연극적이라 조금 거칠 수도 있는걸 부드럽게 편집됐고 상대 여배우가 있어서 가능했다"

오랜시간 배우로 살아오면서 연극학도 시절은 빛바랜 추억이 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장수상회'는 다시 그 시절을 생생하게 재생하는 상영기가 됐다. 박근형은 '장수상회'를 통해 배우로서 자신의 근본인 연극학도의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인물을 표현하는데 있어 내적인데서부터 외적으로 표현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나만이 갖는 독창성이면서 연극학도들의 무조건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최초 감독님의 시나리올르 보고 느낀 점들을 머리에 두고 이해한 후 내 상상력을 빌려 내 몸을 빌어서 다른 걸 표현하는 것. 그게 기본적인 연극학도의 방식이다. 이번에도 그 방식대로 했다"

# "실제 성격? '박씨 아저씨' 박근형이다"

최근에는 다소 딱딱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역할을 맡아왔던 박근형이 tvN '꽃보다 할배'를 통해 로맨틱한 모습을 선보이며 새로운 매력을 선보였다. 사실 배우로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지만 이렇게 좋은 반응을 얻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실제로는 '박씨 아저씨'다(웃음). 맘대로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젊었을때는 여자들 심부름도 해주고 어우러져서 잘 지냈다. 그런데 강렬한 역할을 맡다보니 엄격해보이고 까칠한 사람으로 보인 것 같다. '꽃보다 할배'에서 아내가 수술한지 얼마되지 않아 걱정돼서 전화했는데 너무 좋은 이미지로 비춰져서 깜짝 놀랐다. 사실 나 말고도 다들 집에 전화한다(웃음)"

이렇게 다정다감한 남자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박근형은 부드럽고 스윗한 남자였다. 하지만 막상 아내는 '꽃보다 할배' 속 박근형의 로맨틱한 모습을 못마땅해한다고. 서로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털어놓으면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 그의 모습은 솔로들의 마음에 사랑에 대한 열망이 불지피기 충분했다.

"'꽃보다 할배'가서 사진찍어온 걸 보여줬더니 '같이 가야지 사진만 보여주면 뭐하냐'고 하더라. 애교 떠느라 선물로 때우는 거다. 처음에는 여자들이 사용하는 용품을 샀는데 한국에 더 좋은게 많다더라. 한국이 더 좋은게 많은데 헛수고라고 하니까 할 말이 없었다. 묵주같은 종교에 대한 선물을 좋아한다. 지난 겨울에는 갑자기 오리털 외투를 사달라길래 겨우 오리털이냐고 했더니 그게 당장 입고 싶다고 해서 사줬다(웃음)"

이렇게 그는 세대간이 소통할 수 있는 콘텐츠에 벌써 두 번째 출연하게 됐다. '꽃보다 할배'에 이어 '장수상회'까지. 이미 '꽃보다 할배'를 통해 많은 대중과 소통하며 힘을 느꼈던 그에게 배우로서 도전한 '장수상회' 역시 사명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도 내 운이다. 우리한테는 나이 많은 배우들이 많은데 젊은 배우들과 같이 합쳐져서 새로운 콘텐츠가 개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 이번 기회로 모두가 소통할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

"세계적으로 우리 배우들 연기가 아주 우수하다. 우수한걸 묻어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청춘 드라마의 트렌드도 좋지만 폭넓게 번지길 바란다. 그래서 '장수상회'를 더 잘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겨 연극학도처럼 하게된 것도 있다"

그는 사명감에 대한 부담감 대신 자연히, 그리고 꼭 져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작품이 좋았고 깊이 생각하다보면 이게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도 있다고. 박근형은 자신의 소박한 꿈을 밝혔다.

"팔순 넘어서 여기서 부름이 없을때 귀향할거다. 고향에 내려가서 옛날 서당처럼 연기에 적성맞는 애들하고 같이 책읽고 이야기하고 싶다. 어렸을때부터 하고 싶었던 걸 못했던 사람들과 조그만 극이라도 올리며 문화적으로 확대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지금도 고향에 다니면서 그런 모임을 추진해서 같이 참여하고 있는게 4년째다. 나이가 많아지면 다음 세대한테 물려주면 되니까 계속 이어나가고 싶다"

이렇게 연기에 대한 욕심이 남다른 배우 박근형, 그에게도 배우를 그만두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 나쁜 마음을 먹기까지 했지만 군대를 가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자신을 추스렸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순간 올렸던 연극 한 편으로 동아연극상을 타면서 다시 배우 박근형의 삶이 시작됐다.

"이왕 내려온김에 '하나 더'라고 하다보니 계속 연극을 하고 드라마를 하게 됐다. 그 다음에 또 연기생활이 지속되다보니 영화 쪽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사는 동안에도 나의 갈 길은 이 길이었나보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한 눈을 팔아본 적이 없다. 오로지 배우라는 것에 지금도 자긍심을 갖고 있다"

박근형은 200여편의 작품을 해오면서 꿋꿋하게 배우로서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솔직하게 자신이 출연했던 작품이 끝나면 모두 잊어버린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모든 걸 비워놓을 수 있기에 새로운 걸 채워넣을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그는 또 어떤 새로움을 자신에게 채워넣을지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런 좋은 배우가 있기에 참 행복하다.

(사진=권희정 기자)

OBS플러스 정솔희 기자 hwasung654@o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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